Richard David Precht는 1964년생으로 철학자이자, 출판인, 작가, 그리고 독일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중 한 명이다. 철학과 미학 분야의 명예교수로 베를린과 뤼네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한국어 제목: 원제-Wer bin ich – und wenn ja, wie viele?)”, “사랑, 그 혼란스러운(한국어 제목: 원제-Liebe, Ein unordentliches Gefühl)” 등의 저서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2016년 “Tiere Denken: 동물을 생각하다”라는 제목의 동물과 인간 사이의 윤리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이하 인터뷰 내용에서 인터뷰 진행자는 S(Susanne Fritz)로 Precht는 P로 표기한다.

S: 독일에는 780만의 채식주의자와 90만의 비건이 살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늘 건강상의 문제와 함께 동물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사회의 압도적인 다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고기를 먹어치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동물공장에서 발생하는 비참함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고, 도축장의 내부를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동물과 맺고 있는 관계가 동물을 우리와 동일한 창조물이 아닌 사물로 보는 윤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철학과 종교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각인시켰다. 이에 대해 철학자 Richard David Precht와 대화를 나눠보겠다. 그는 동물윤리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은 오늘 “동물을 생각하다 – 동물의 권리와 인간의 경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Precht,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그로테스크하게 모순적이다. 한편에서는 개, 고양이, 기니피그와 같은 반려동물에 대한 태도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한다. 여하간 이러한 우리의 태도는 오래된 것이다. 무엇이 당신에게 이 주제를 다시 다루고 동물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책을 쓰게 했는가?

P: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주제는 과거보다 오늘날 더 긴급한 것이 되었다. 한편으로 독일의 채식주의자와 비건의 숫자가 증가했다. 많은 젊은이가 더는 고기를 먹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대량사육은 20, 50, 100년 전보다 점점 더 그로테스크해지고 있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가축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런 공장 중에 일부는 30만의 동물을 가둘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엄청난 것이다.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과 독일인들이 일상에서 동물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다.

S: 만약 우리가 역사, 그러니까 인간의 문화사를 살펴본다면, 기원전 시대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

P: 석기시대의 사냥꾼들이 자기 자신을 자연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편에는 인간의 문화가 있고 다른 한편에 자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연 속에서 살았고,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동물과의 관계가 있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인상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가족이 함께 묻혔다. 그리고 거기에 개나 소도 함께 묻혔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 또한 자신들과 함께하는 것, 더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정신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자연의 일부로 느꼈다.

S: 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전우로 변하게 되었는가?

P: 가장 큰 변화는 농경과 목축의 체계적인 확정을 통해 나타났다. 그러니까 신석기 혁명을 통해서 발생했다. 동물이 가축이 되고 그들의 삶이 완전히 인간의 손에 맡겨지는 순간에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강력하게 사물에 대한 태도로 바뀌게 되었다. 당연히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 10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진행된 것이다.

아마도 1만 년 전부터 개와 함께 가축에 대한 태도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짐승의 발자국을 추적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어느 순간 소가, 그리고 닭에 대한 태도가 추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면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하였다.

동물이 더는 인간과 함께하는 세계(Mitwelt)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Umwelt)으로, 그러니까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한 것이다.  

S: 자연에 대한 지배와 함께 소외의 과정이 수반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P: 그렇다, 이것은 가장 주목할만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더 강하게 지배할수록, 인간에게는 지배당하는 것들이 더욱 영혼이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기술과 인간 문화가 승리를 이어가면서 우리는 더는 동물의 가치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우리는 더는 동물을 영혼을 가진 생명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우리는 동물을 우리의 판단에 따라 처리하고 관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S: 자연과 동물에 대한 존중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철학적 사유구조와 유일신 종교는 결정적으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동물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기원전 2000년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상상력 안에서는 동물이 큰 의미가 있었다. 얼마나 그러한가?

P: 그렇다. 고대 이집트만큼 동물 친화적인 종교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집트 하면 사막을 떠올리는 것과 달리, 기원전 2000, 3000년 전 이집트는 오늘날 세렌기티와 같은 초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코끼리, 영양, 가젤, 물소가 있었다. 당시의 생태(Biotop)는 오늘날 아프리카의 사바나와 유사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늘날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자연과 생동력 있는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의 사람들은 삶의 한 가운데서 사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한편에는 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하늘이 있는 상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상은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처음을 발명한 것이다. 대신 이집트인들은 순환적 삶의 운동하에 있었다. 이러한 순환적 삶은 나일강의 홍수가 가지고 있는 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자연에 대한 태도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신계에 최소한 1/3은 동물의 모습을 한 신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 동물에 대한 숭배가 있었다는 것, 사람들이 동물을 방부처리하고 동물 속에서 신의 에너지가 종교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S: 유일신 종교는 동물숭배와 폭력적으로 싸웠고 금지했다. 기독교인들은 이집트의 신전을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파괴했다. 동물은 모든 유일신 종교 속에서 거대한 의미의 상실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종교들 속에서 인간은 홀로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지금 유대교는 동물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P: 이집트와 유대교의 차이는 창조신화를 통해 매우 잘 알 수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신화를 보면, 신은 6일 동안 세계를 창조한다. 이 세계와 이 세계의 의미 전체는 오직 한 동물 종만이 완벽히 적합한 것으로 판단할만한 배경과 거주지를 창조했다는 것에 있다. 바로 인간이다. 별조차도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그곳에 존재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완전히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 속에서 동물은 큰 의미가 있지 않다. 물론 이 신화에 결합한 좀 더 오래된 신화도 존재한다. 여호와 문서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 속에서 신은 여자를 만들기 전에 동물을 창조했다. 동물을 통해 신은 아담이 혼자라고 느끼지 않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애니미즘의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가나안족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후에 유대 신앙과 섞이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대교는 동물을 사물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들은 동물을 가축으로만, 그러니까 밭에서 일하는 황소로만 알게 되었다. 동물은 더는 주술적 종교적 순환 속에 함께하는 함께 창조된 존재, 동반자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S: 기독교는 유대의 성경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다르게 배치하여 구약으로 정식화했다. 동물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가?

P: 유대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하간 일부의 동물 윤리적 원칙들이 발견된다. “가축을 잘 대해야 한다”와 같은 것이 그렇다. “밭을 갈고 있는 소의 재갈을 물리지 말라”는 유명한 문장이다. 이를 통해서 소는 숨을 더 잘 쉴 수 있고, 사이사이 물을 마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가축 친화적인 계명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 계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이 문장은 바울에 의해 비유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신이 소를 돌보는 것처럼 무엇을 돌보고 있지 않은가? 신은 어디에서든 우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 기독교는 유대교가 시작한 동물의 대상화를 끊임없이 진행하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인간만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인정했다.

S: 하지만 기독교에서도 동물을 인간과 같은 창조물로 보는 상상력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12/13세기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경우가 있다. 어느 정도 프란체스코의 생각이 가톨릭 교리에 영향을 주었는가?

P: 그렇기는 하지만, 매우 협소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사회사상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에 이르는 교회의 정치 권력에 대한 추구 속에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오히려 알리바이를 제공할 뿐이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그는 매우 동물 친화적이었고, 거미의 생존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거미줄을 고쳐주었으며, 심지어 새를 위해 설교를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신앙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의 외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재빨리 성인이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더는 그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인터뷰 2로 이어집니다.

(https://www.deutschlandfunk.de/richard-david-precht-ueber-den-umgang-mit-tieren.886.de.html?dram:article_id=368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