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대서양을 횡단하는 요트 항해에 나섰다. 뉴욕에서 열리는 기후 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여행을 위해 태양광 패널과 수중 터빈이 장착된 요트를 택했다. 장거리 이동, 특히 비행기를 이용하는 여행이 기후 변화에 미치는 악영향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가장 많은 곳에 등장하는 환경운동가다운 선택을 했다.
유럽환경청(European Environmental Agency)에 따르면 1Km 이동 시 승객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항공기가 285g이다. 기차가 14g인 것과 비교해 지나치게 높은 수치이다. 항공기 이용이 기후 변화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비행기에 탑승할 때 느끼는 수치심을 의미하는, 독일어로는 플루크샴(Flugscham)이라고 하는 단어가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에서는 Flygskam, 핀란드에서는 lentohapea, 네덜란드에서는 vliegschaamte라고 한다.
사업과 업무를 위한 이동뿐 아니라, 휴가나 여행을 위한 이동이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독일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지 2019년 8월 5일 인터넷판 기사에 따르면 기후에 악영향을 미치는 전 세계 탄소 배출 중 5%가 여행에 의해 발생한다. 그중 비행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간의 이동이 지구의 환경에 남기는 어둡고 거대한 족적뿐만 아니라, 대중이 즐기는 휴가와 여행이 풍요로운 문화와 자연을 가진 지역에 어떤 문제를 야기시켰는지에 대한 비판을 진지하게 다룰 시점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독일에서 여행이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비행기 예약률이나 해외여행 수치 또한 높아졌다. 여행이 환경과 인간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에도 불구하고 길고 풍요로운 휴가는 여전히 지구상의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고 여전히 서구의 부유한 국가에서도 선망의 대상이다.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단체 패키지 여행이나 에펠탑과 모나리자 앞에서 사진을 찍는 수많은 사람에 대한 은근한 경멸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이 즐기는 현대의 여행은 여행 대중화의 산물이다. 여행 산업의 발달이 아니라면, 여행이 대중이 향유해야만 하는 상품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해외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사람은 극소수뿐일 것이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의 대중화와 대중들이 향유하는 여행의 형태는 노동자들의 휴가 기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는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로서 대중의 삶을 관리하는 방식과도 연결되어 있다. 툰베리가 뉴욕을 향한 약 2주간의 여정에 올랐을 때, 어쩌면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요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뉴욕까지 가는데 2주나 허비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일 것이다.
허가에서 탈출로, 그리고 향유로
휴가를 뜻하는 독일어 Urlaub은 중세 고지 독일어인 urloup에서 왔다. 이것이 원래 의미하는 것은 허가(Erlaubnis)였다. 이것은 원래 지배자의 힘이나 군대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것을 즐기기 위한 여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Urloup은 긴급한 업무나 개인적 사정에 의해 지배자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이 허락된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것이 시대를 지나며 일상에서의 일탈과 일상이 아닌 것을 즐기는 의미가 포함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휴가의 역사에 대한 독일 자료를 찾다 보면 괴테의 이름이 종종 등장한다. 1749년생인 괴테는 자신의 주군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속에 1786년 9월 3일 새벽 자신이 근무하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몰래 빠져나와 2년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한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의 예술 이력에서 전환점이다.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을 썼던 젊은 괴테는 이 여행을 통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나 <파우스트>와 같은 대작을 쓰는 다른 작가가 되었다. 여행을 통한 괴테의 전환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여행에 대한 환상의 전형과 같은 것이다. 물론 기간이 매우 짧아졌고, 여행 후 우리가 괴테처럼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
괴테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던 시절에는 급여가 나오는 정기휴가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돈이 나오지 않는 정기휴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고위 관료였던 괴테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시 괴테와 같은 고위 관료의 경우 집안에 일이 있거나 특별한 용무가 있으면 휴가를 낼 수 있었지만, 단지 휴식을 위한 휴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괴테는 새벽에 몰래 길을 나서야만 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행이라는 것은 시간과 돈을 모두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재산을 가진 귀족들만이 휴식이나 기분전환, 혹은 배움을 위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시민계층의 생활 표준에서 노동자들의 휴가로
하지만 휴가는 점점 시민계층(Bürgerliche Schicht)이 영위하는 표준적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미 150년 전 시민계층의 사람들은 여름마다 자연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휴가는 먼 일이었다. 19세기 중반 공장의 노동자들은 ‘주 6일, 하루 16시간’ 고강도 노동을 해야 했고, 휴가란 없었다. 그리고 1880년대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휴가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휴가는 아래로부터 쟁취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자유적 좌파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소수의 시민계층 사업주들이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휴가를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커지는 노동운동의 위험을 경감할 필요도 있었다. 또한 회복 기간을 통해 노동력을 다시 충전시키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최초로 휴가를 준 것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인쇄소였다. 1900년까지 약 70에서 80개의 회사에만 휴가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주로 인쇄산업의 중소 업체에서 휴가가 주어졌다. 이 업체들에서는 노동자들과 경영자계층의 관계가 중요했다. 하지만 당시의 휴가는 지금과 같은 정기휴가와 성격이 달랐다. 회사의 창립기념일 같은 특정한 날을 기념하여 직원들에게 휴가가 주어졌다. 사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보상의 형태로 휴가를 주어 회사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려 했다.
일반 육체노동자에게 정기휴가가 처음 도입된 것은 노동조합이 잘 조직되어 있던 맥주 양조사업 분야에서이다. 1903년 베를린의 슐테이스 양조장(Schultheiss Brauerei)에서 단체협약을 통해 1년의 3일 급여가 나오는 정기휴가가 처음으로 보장되었다. 그 후 몇몇 사업장이 자율적으로 노동자들에게 3~6일의 휴가를 보장해주었다. 특히 양조업, 제분업, 인쇄산업 분야에서 휴가가 보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휴가는 낯선 것이었다. 거기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휴가의 대부분은 급여가 지급되지 않았다. 반면 공무원과 사무직 직원의 휴가는 1873년에 시작되어, 1914년에는 직급에 따라 3일에서 6주간 급여가 지급되는 형태로 보장되었다.
1920년대 와서 노동조합들은 급여가 지급되는 온전한 형태의 정기휴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노동조합들은 단체 임금 협상을 통해 휴가에 대한 규정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1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탄생한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였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말년에는 노동자들에게는 3~4일의 정기 휴가가 보장되었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교육조직은 노동자들의 휴가를 목적으로 여행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라인 강가나 발트해로의 여행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했다. 노동조합은 휴가지 숙소를 자체적으로 건설하기도 했다.
“자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국민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큰 정치를 할 수 있다”
1933년 나치의 집권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노동조합은 해체되었으며, 노동조합이 지은 휴양시설은 압류되었다. 그해 말 나치의 하부 조직인 “기쁨의 힘(Kraft durch Freude)”이 창설되었다. 이 조직을 통해 휴가는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이용되었다. 히틀러는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나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휴가가 보장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국민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큰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힘(Kraft durch Freude)”은 일반 국민과 나치당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다양한 여가 상품을 제공했다.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정부에 충성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의 성격으로 무료 여행이나, 추가 휴가 기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특히 인기가 많고 효과가 좋았던 것은 대양을 항해하는 크루즈 여행이었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크루즈 여행이 인기다. 최근 독일의 슈피겔지는 수천 명이 탑승하는 크루즈 여행이 소비하는 어마어마한 물자와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심층 기사를 내보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DDR) 정부도 휴가를 시민들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동독 정부는 1949년 모든 노동자의 휴가권을 헌법에 포함했다. 동독의 “자유 독일 노동조합연맹(Freie Deutsche Gewerkschaftsbund)”은 휴가부(Feriendienst)를 설치했다. 이 기관은 동독 전역의 휴양시설을 국유화했고 새로운 거대 숙박 단지를 건설했다. 동독 정부는 휴가지를 국유화하여 휴가 자체를 국민 관리의 도구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휴가지에서도 국민을 감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동독 주민들의 반발도 존재했다. 당시 바닷가에는 최고 지도자였던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의 연설이 나오는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부서지곤 했다. 또한 휴가부에서 제공하는 여행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캠핑이 유행했다. 그러면서 계획에도 없는 많은 인파가 북해로 몰려들었고, 30만에서 40만 명이 북해에 몰려들어 생필품의 부족 현상도 일어났다.
저기 비행기의 도입과 대규모 여행산업의 발달
하지만 이러한 대중의 집단 여행은 전체주의 사회의 산물만은 아니다.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산업화에 따른 교통시설의 발달, 새로운 수요 창출의 필요, 그리고 대중의 욕구는 대규모 인구의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대중 패키지여행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영국이다. 철도의 발명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새로운 교통의 대중화는 여행의 규모, 여행 거리의 변화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기 대중 여행을 조직했던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토마스 쿡(Thomas Cook)이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사 <토마스 쿡>의 창업자이다. 그는 술을 아주 싫어했다. 그는 영국의 산업 노동자들이 휴식 시간을 술집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녹색의 자연에서 보내게 해주기 위해 여행상품을 만들었다. 영국의 철도회사는 기차를 만석으로 채울 수 있다면 표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저렴한 여행상품을 제공할 수 있었고 한 번에 500에서 1,000명을 바닷가로 보낼 수 있었다.
사회주의의 선전도구로서 여행이 조직된 동독과 달리 서독에서는 경제 부흥과 함께 여행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1950년대 서독은 놀라운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그 당시 서독인들에게는 작은 자동차를 끌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꿈이었다. 이탈리아는 당시 나치를 겪은 서독인들이 여행하기 좋은 나라였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인 자신도 파시즘을 겪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은 나치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0년대에는 남쪽으로 가는 도로와 다리 및 터널들이 새롭게 건설되면서 독일인은 더 쉽게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 처음으로 18일의 법정 정기휴가가 보장되면서 휴가와 여행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많은 독일인에게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독일인들에게는 휴가 기간 중 바닷가에서 피부를 갈색으로 태우는 것이 유행했다.
현재의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해외의 음식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50, 60년대에만 해도 독일인들에게 이탈리아의 음식조차 낯설었다. 50년대 독일인을 위한 이탈리아 여행 책자에는 “스파게티가 너무 길더라도 칼로 자르지 말고 먹어라”라는 안내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알프스를 넘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필터 커피, 치즈, 소시지 등을 가지고 떠났다고 한다. 또한 독일인들이 많이 묶는 호텔에서는 독일식 아침 식사가 제공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인 중 5일 이상 휴가를 떠나는 사람은 전 인구의 1/3에 불가했으며, 대부분은 국내를 여행했다. 비록 독일인들의 이미지 속에는 이탈리아가 꿈의 여행지였지만, 실제로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직까지 독일인들에게 지중해의 나라들은 환상적이지만 낯선 곳이었다.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이 증가하고 독일인이 샹그리아나 올리브 같은 이국의 전형적인 음식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저가 항공상품이 공급되기 시작한 70년대부터이다. 70년대에는 오일쇼크가 발생했고 기름값은 올랐지만, 여행산업은 비행깃값을 저렴하게 유지해 여행산업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독일의 경제성장은 70년대에 와 정체기에 들어갔지만, 해외 여행객 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특히 당시부터 마요르카 같은 스페인의 휴양지가 독일은 관광객을 위해 개발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권은 외화를 벌기 위해 서유럽인을 비자 의무에서 제외해줬으며 여행사업자들에게 호텔과 리조트를 건설하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줬다.
63년 이후로도 독일의 법정 휴가일은 늘어났다. 이제 독일인들은 지중해 국가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아시아 같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현재 독일 법이 보장하는 최소 휴가 일수는 24일(평일 기준)이다. 그리고 산업별 협상에 따른 휴가 일수는 이것보다 많아, 독일인들의 평균 휴가 일수는 30일이라고 한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휴가 일수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경제적 풍요가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여행의 증가를 막기는 쉽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만약 독일과 소수 유럽국가의 시민들이 비행기 탑승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껴 비행기 이용을 줄인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들이 누렸던 풍요를 누리지 못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행산업은 끊임없이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상품을 개발할 것이며, 우리는 매혹적인 것에 대한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풍요로운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우리의 소비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