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 이승혜
인터뷰어: 손어진
인터뷰날짜: 2019.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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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하면서 호기심으로 기내식도 비건으로 신청했다. 비행기를 타던 날 아침도 평범하게 밥에 계란에 비엔나 소세지를 먹고 10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책을 읽고 채식으로 식사를 하고 비행기에 내려서 마중 나온 친구한테 이야기 했다.

“오늘부터 나 비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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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서 누가 “내 음식 재료는 다 덤스터 다이빙해서 구한 거야. 다 공짜로 얻은 거야” 그러면 다들 “너무 멋있다! 최고다! 어디서 했어?”라는 분위기가 나는 정말이지 너무 좋다. 방학 때 누가 여행 갔다 왔다고 하면 “혹시.. 비행기 탔어?” 묻는다. 그러면 비행기 탄 애가 “아.. 미안해.. 비행기 탔어” 하며 수치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생명권. 이 모든 것이 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모두의 행복할 권리인 것이다. 내가 남을 해치면서까지 이익을 얻어야 되는 이유는 없다. 그 피해가 소수자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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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무사히 잘 마쳤다. 고생하셨고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공부했던 분야와 내용을 좀 소개해줄 수 있나?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전공을 했다. 석사과정 자체는 경제학부 소속이지만 지속가능성이 대한 이론부터, 신재생 에너지 기술과 시장 모델링, 바이오매스, 자원활용, 국제경제, 개발 등에 대해 조금씩 다양하게 접했다. 아프리카 연구라는 수업도 있었고 지속가능한 도시에 대해 배우며 트랜지션 타운(transition town),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 등 각국의 다양한 공동체에 대해 배우고 발표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연구, 얼반 플래닝(urban planning) 같은 수업도 들었다. 여러 분야를 전반적으로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좋았는데, 지나고 보니 한 부분을 깊게 전문성을 쌓지는 못한 것 같다. 졸업하고 기업이나 비영리 단체 등에서 일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깊이 있는 전문성을 쌓고 싶어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전공분야에 대한 계획 없이 시작한 석사였지만, 라이프치히)라는 도시가 다양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접하고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이라 실생활에서 많이 배웠고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도 좋아서 재밌었다.

환경평가 중에서도 한 제품이 생산되는 모든 프로세스, 재료의 채굴부터 사후처리까지, 평가하는 “전 과정 평가 (Life cycle assessment, LCA)”를 바이오매스 프로세스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는데, 내가 학부 때 전기공학을 전공해서 화학 쪽 지식이 많지 않아서 조금 어려웠다. 지금 지원한 박사과정은 구체적인 생산 프로세스라기보다는 거시적으로 한 국가나 지역, 글로벌 차원에서의 “xx년까지의 바이오매스 계획” 을 살펴보기 위해 어떤 시나리오 들을 선정해야 하고, 각 시나리오 하에서 어떤 제품들이 얼마만큼 필요할지 수요를 예측하고, 결국엔 어떤 재료에서 어떤 프로세스로 생산하는게 환경 친화적인지 평가하는 프로젝트이다. 아무 박사과정이나 하고 싶은 건 아니라서 주제도 잘 맞고 좋은 교수님을 만나고 싶다. 물론 도시도 마음에 들어야 한다. 일단 지원했으니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평가, 이 분야에서 일을 한다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나?

요즘은 환경평가를 하는 회사들이 일이 많다. 기업차원에서는 반드시 환경평가를 보고서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홍보 차원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굉장히 수요가 많다고 하는데, 거시적이거나 범주가 넓은 일들은 정부에서 펀딩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지원했던 교수님도 잠깐 학교 밖에서 회사를 차려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의뢰도 많이 들어오고 돈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 다만 3년, 5년 단위의 학교나 정부 프로젝트와는 달리 몇 개월 내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또 개별 제품이나 프로세스의 환경평가도 중요한 일이지만, 거시적인 기후변화 미티게이션(mitigation)에 기여하고 싶어 연구 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처음 자브뤼켄(Saarbrücken)이란 도시에 있었다.

프랑스 국경에 있는 인구 20만의 소도시였다. 그곳에 한국과학기술원이 있어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라이프치히대학 석사과정에 지원해서 들어간 거다. 첫 도시 자브뤼켄은 1년 살기는 괜찮은 도시 같다. 그 이상 있었으면 심심했을 것 같다(웃음). 지금은 좀 더 대안적인 활동이 늘어나긴 했지만,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카우치서핑(couch surfing)이나 옷 교환 모임, 리페어 카페, 채식에서 만난 애들이나 거의 비슷했다. 20만 명 중 그런 대안적인 모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애들이 10명 정도밖에 안 되는 거다(웃음). 베를린은 하루에도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 너무 많은데, 거기서는 내가 하고 싶은 모임이 있으면 내가 직접 모임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0년부터 “비건(Vegan)”으로 살고 있다. 독일에 오기 전까지 “베지테리언”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비건이란 말은 아직까지 낯선 개념이었다.

독일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독일은 사회운동을 하거나 환경운동을 한다고 하면 베지테리언이거나 적어도 관심이 많아서 시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건은 여기서도 익스트림(extreme)하다고 하니까 비건은 아니어도 최소한 베지테리언(웃음). 나의 식습관과 정치적 성향이 같이가는 것이다. 물론 환경운동을 하는 게 아니더라도 좌파운동을 한다고 하면 모두가 다 베지테리언은 아닐지라도 모임을 하면 음식은 당연히 채식으로 준비한다는 개념이 있다. 내가 먹는 게 바로 내 정치적 선택이라는 의미가 큰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환경단체에서 고깃집으로 회식 가는 일도 이상하지 않고… 연결이 안 되는 것 같다. 설악산, 반달곰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기의 생산과 소비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나의 일상생활을 바꾸는 것도 중요한데 말이다. 어쩌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정도로만 환경운동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환경단체들의 경우 후원자들이나 후원기업들 눈치를 보느라 비건이나 채식을 가치로 앞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비건, 채식 단체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너네는 환경단체라고 하면서 고래와 오랑우탄 구하는 얘기는 하면서, 우리가 실생활에서 해하는 동물들, 이를 위해 파괴되는 자연에 대한 건 왜 강조하지 않나”라고 비판을 많이 하는데, 사실 못하는 거다. 환경단체 심지어 동물보호단체를 후원하는 보통의 독일 사람들도 자신들의 일상생활, 식습관을 바꾸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공격당한다고 느낀다. ‘나는 환경과 동물을 보호하려고 후원금을 내지만, 너네가 나더러 이거 먹어라 저거 먹지 마라 할 수는 없다’는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채식이 쉬운 이유는 어디를 가나 채식 옵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게 불편한 일이면 안 하지 않나. 물리적으로 채식 옵션을 얼마나 많이, 쉽게 얻을 수 있느냐가 안 돼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채식이 어려운 것 같다. 내가 굳이 채식임을 이야기하고, 담당자를 괴롭혀서 얻어내야 하는 거면 몇 배로 더 귀찮은 일이 된다. 게다가 주변인들의 오지랖과 회식은 얼마나 많은지! 각자 메뉴를 시키기 보단 단품메뉴를 시켜서 다 나눠먹기도 한다. 한국은 여러면에서 아직 채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어떻게 비건 삶을 시작하게 된 건가?  

사실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정치문제, 사회문제에 관심 있었던 적이 없었다. 환경에도 크게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 다니고 돈 벌고 성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크게 독한 성격은 아니라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꼭 크게 성공해야지’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남들 하는대로 해야지’ 하며 살았던 것 같다. 뉴스에서 말하는 것은 특별히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인문대나 사회과학대에서 데모를 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한 학기 어떻게 버티지, 졸업해서 뭐하고 살지’ 내 앞가림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했는데, 회사 밥이 너무 맛이 없는 거다. 그래서 친한 동기들과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환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짜 회사 밥이 맛없어서(웃음). 그땐 당연히 비건도 아니어서 도시락을 비건으로 싼 건 아니었다. 그런데 도시락을 싸다 보니까 요리법을 찾아보고 하다가 우연히 비건 블로그를 본 거다. 요리가 꽤 괜찮아서 그분 요리법으로 많이 해먹었다. 그때도 딱히 비건 블로그라는 것보단 ‘맛있는 음식을 하는 블로그구나’ 생각했다(웃음). 그리고 나서 9월 말에 첫 휴가로 일본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있는 캘리포니아 LA에 놀러 가게 됐다. 아직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비행기 안에서 읽으려고 책을 두 권 샀는데, 그게 바로 채식에 관련된 책이었다. 아마도 그때 블로그 보면서 관심이 있었나 보다. 물론 환경이나 윤리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채식을 하면 건강해지고 피부도 좋아지고 한다니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웃음). 당시 회사 다니면서 처음으로 10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서 어깨도 아프고 피부도 안 좋아지고 하니까 건강해진단 말에 혹 했던 것 같다(웃음).

그때 산 책이 황성수 박사의 “현미밥 채식(2009, 페가수스)”과 킴 바노인의 “스키니 비치(skinny bitch 2009)”였다. 황성수 박사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채식이 건강에 전혀 문제가 안되고 오히려 더 좋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채식이 내 생존에 전혀 문제가 없구나” 생각하게 됐고, 술술 읽혀서 비행기 타기도 전에 다 읽었다. 그다음에 스키니비치를 읽었는데 제목만 보면 살 빼고 예뻐지고 싶은 여자애들을 대상으로 쓴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미끼로 식품산업의 검은 속내와 공장식 축산의 윤리적인 부분도 다루는 책이었다. 저자는 전직 모델들로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책 내용에 공장식 축산 이야기도 나오고 설탕이나 유제품에 대해서도 나온다. 이 책은 비행기 안에서 읽기 시작해서 LA에 있는 동안에 다 읽었다. (그 시절 최고로 도움이 됐던 팟케스트: “Food for Thought” https://www.colleenpatrickgoudreau.com/food-for-thought-podcast/) 그리고 이유는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비행기표 예매 시에 호기심으로 기내식도 비건으로 신청했다. 비행기를 타던 날 아침도 평범하게 전혀 문제의식 없이 밥에 계란에 비엔나 소세지를 먹고, 10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책을 읽고 채식으로 식사를 하고, 비행기에 내려서 마중 나온 친구한테 “오늘부터 나 비건이야!”라고 이야기했다(폭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친구의 반응은 어떻던가?

“나 비행기에서도 비건으로 먹었어!” 그랬더니 친구가 되게 황당해하면서 “점심때 너랑 같이 먹으려고 치킨카레 사 왔는데..” 그러는 거다. 물론 그때는 왕 초보라 “그럼 너는 치킨 건더기 먹고 나는 카레 먹으면 되지” 그랬다(웃음). 그리고 열흘 동안 LA에서 정말 비건으로 잘 먹고 다녔다. 그때도 LA는 비건들의 천국이었다. 비건 음식점도 많고 식품점에만 가도 비건 옵션이 정말 많았다. 비건 요리책을 주문해서 집에 받아서 요리도 해서 먹었다. 물론 한 번은 친구가 여기서 피시 타코(fish taco)는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먹었고, 또 다른 친구의 부모님 댁에 갔는데 부모님이 따로 비건 요리를 할 줄 모른다고 해서 거기서 구운 연어를 먹었고, 마지막 날 LA를 떠나기 전에 어느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갔는데 이 집은 라자냐가 유명해서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시켜서 친구와 나눠 먹었다. 딱 세 번 일탈을 했다(웃음). 전혀 준비 없이 간 곳에서 덩달아 친구도 재밌게 비건으로 잘 지냈다.

그리고 돌아와서 가장 가까이 오랫동안 함께 밥을 먹었던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첫 반응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초기에 굉장히 비협조적이었다. ‘왜 유난을 떠냐, 혼자 튀냐, 절대로 도시락 안 싸줄 거다’ 뭐 그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너를 위해 따로 요리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엄마에게 채식의 윤리적인 이유를 많이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나도 처음엔 건강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엄마는 ‘나는 몸에 안 좋아도 맛있는 거 먹으면서 즐기면서 살다 죽으련다’는 주의라 논쟁이 안 되는 거다. 아빠는 내가 새로운 음식을 해주면 잘 먹는 편인데, 엄마는 잘 안 먹는다. 엄마가 원래 두부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내가 채식하고 나서야 알았다. 두부도 싫어한다. 만약 채식이 좋다는 이야기를 친구들 중에 누가 했거나 어떤 유명한 의사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내가 이야기하니까 안 믿고 듣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유명한 비건 강연자이자 활동가인 게리 유로프스키(Gary Yourofsky)라는 사람이 있다. 내 주변에도 많을 정도로 그 사람의 강연으로 비건 된 사람이 진짜 많은데, 그렇게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도 자기 부모님은 설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비건을 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주변 사람을 감화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일단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내가 “채식을 한다”라고만 해도 상대보고 채식 좋다 어떻다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절대 채식 못한다’로 시작해서, 그나마 온건한 반응이 ‘나도 너 채식하는 거 존중할 테니 나 고기 먹는 것도 존중해야 한다’이다. 그런데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는 입장에서 이를 취향 존중의 문제로 모는 것은 좀 속상하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아이를 절대로 때리면 안 된다고, 혹은 흑인을 노예로,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보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는 사람에게, 아이를 때리거나 다른 종이나 성의 인간을 소유물로 여기는 걸 ‘내 취향이다 너도 존중할테니 나도 존중해달라’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사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훈육의 차원에서 때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안 때리고 키우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어서 신기하게 보거나 ‘그 사람의 취향/교육관’으로 봤는데 지금은 법적으로도, 부모님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고 있으니 채식에 대한 생각도 그렇게 바뀔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회사 같은 단체 생활을 할 때 비건으로 사는 건은 괜찮았나?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우리 회사는 엔지니어링 회사로 설계, 구매, 건설 부분 중 설계부서에서 일했다. 대학 때도 200명 중 여자는 5명이었고, 회사도 우리 부서원 50명 중 4명이 여자였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직급 별로 한 명 씩 여성이 있었다. 회사에 남자가 많으면 분위기가 안 좋다고 하는데, 우리부서는 괜찮았다. 순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누구를 접대하는 자리에 가야 하는 일은 없었고 회식은 가야 했지만 분기별로 한 번으로 매우 드물었고 술이나 음식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물론 회식 장소 선택권은 거의 없으니 음식을 강요하진 않아도 먹을게 없다고 따로 챙겨주진 않아서 알아서 미리 음식점에 연락하거나 밑반찬만 먹거나 했지만 심리적으로 힘들진 않았다. 내가 좀 튀면 ‘요즘 여자애들은 저런가, 쟤는 좀 특이하네’ 그렇게 넘어가는 게 다였다. 물론 “너 백 살까지 사려고 채식하니?”라고 장난으로 묻는 사람은 있어도 시비 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10시간씩 일하는 장시간 노동과 위계질서. 그런 회사 생활이 힘들진 않았나?

당연히 그래야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8시 출근에 공식적으로 퇴근은 5시 반인데 다들 6시쯤에야 움직인다. 프로젝트 사이클에 따라 매일 9시나 11시까지 야근하는 주도 있었지만, 프로젝트가 한가해서 야근을 안 하는 주가 있다면 위에서 “너네 부서는 일이 없구나, 일을 더 줄까” 그런 얘기를 오갔다며 남아서 공부라도 하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웃긴 일이다.

3년 동안 일을 했지만 사실 내가 일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이 안 맞았었던 것 같다. 한 가지, 회사 일을 하면서 내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를 알았다. 다른 부서나 협력업체, 외국의 고객사들과 늘 회의를 했는데 사람들과 만나서 회의하는 게 참 재밌었다. 나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도 좋아하더라. 좋은 동기들과 동료들과 좋은 곳에서 일해서 참 좋았다. 나는 원래 굉장히 내성적이고 사람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회사에서 사회생활하는 것은 많이 배운 것 같다.

“놀고, 만들고, 나누는” 블로그의 모토가 인상적이다. 승혜님의 삶을 그대로 문장으로 표현한 것 같다. 혼자 놀고 혼자 만들어서 먹고 혼자 즐기는 삶이 아닌 나누는 삶을 선호하게 된 계기가 있나?

특별히 근무환경이 나쁜 회사는 아니었지만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적어도 9시간을 일하고(점심시간은 다행히 1시간) 야근하면 13시간 일하는데 힘든 점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모임을 시작한 것 같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돈은 버는데 시간은 없지, 그래서 취미생활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내가 12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데 이건 인생이 없는 거다’하면서 돈을 내고 취미생활을 하는 거다. 꽃꽂이를 한다거나, 드로잉을 한다거나 수업을 듣는다. 나도 처음에는 책을 보면서 혼자 드로잉을 하다가 홍대 상상마당에서 하는 드로잉 수업을 듣게 됐다. 참 좋은 수업이었다.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제에 따라 좋아하는 음식을 그린다거나 풀을 관찰하고 그린다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에 상관없이 재미를 붙여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같이 수업을 들은 사람들이 참 좋아서 코스가 끝나고도 계속 모임을 했다. 모임 중 한 분이 메이커 스페이스(Maker Space) 공간을 하나 안다고 해서 거기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드로잉 모임을 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사한 동네에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북카페를 알게 됐는데, 카페에서 하는 행사에 몇 번 갔다가 거기서 일하는 동갑의 팀장 친구와 친해졌다. 그곳에 주제별로 몇 개의 책 모임이 있었는데 ‘생태’ 관련 모임 리더를 맡아줄 수 있냐고 해서 그것을 시작으로 계속 모임을 하게 됐다.

물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할머니 ⓒ승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드로잉 모임 ⓒ승혜

드로잉 모임, 책모임 하면서 평소 만나보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 알았다. 내가 모임 만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엄청 열심히 했다(웃음). 월요일에 드로잉 모임, 평일에 한 번 책 모임, 주말 한번 또 다른 책 모임 이렇게 모임 3개를 했다. 일주일에 고정적인 모임이 3개가 있었고, 짬 내서 저녁마다 친구들 만나고. 어떻게 그걸 다 해냈는지 모르겠다(웃음). 지금의 나는 엄청난 집순이고 집에 있어야 에너지를 얻는 타입인데 말이다. 사람을 만나는 건 좋지만 만나고 나면 정말 피곤해서 그다음 날 쉬어야 한다(웃음). 아마도 회사가 좋은 점도 있고 힘든 점도 있지만 거기서 나의 가치가 증명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모임에 가면 내가 의미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게 좋았다. 그 때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었다. 요시다 타로의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녘, 2004)” 같은 책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재밌는 모임들, 나쁘지 않은 회사 생활을 다 정리하고 외국에 나오는 결정이 어렵지 않았나?

원래 해외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항상 있었다. 취직도 해외로 바로 하고 싶었지만 공대생으로 다양한 대외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학교 성적도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어서 그런 곳에 지원할 정도는 아니었다. 공대생이 갈 수 있는 곳 중 IT 외에 서울에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엔지니어링 회사다. 보통 공장들은 지역에 있으니까 취업 준비할 때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고른 거다. 회사 다니면서 괜찮게 돈도 벌었지만 그래도 항상 외국에 나가서 살 거란 생각을 했다. 일본에서 교환학생 경험도 있고, 미국에서 지낸 경험도 있긴 한데 그게 어떻게 영향을 미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에서 살고 싶진 않았으니까.

지금도 꾸준히 사람들과 드로잉, 비건 포트락 모임, 물물교환 행사, 에코 공동체 방문 등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하는 모임과 작업이 사실은 쉽지 않을 것 같고, 시행착오가 필요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자브뤼켄의 연구실 생활은 한국이랑 비슷하더라. 인턴이라 월급을 아주아주 적게 받는 것만 빼고 회사생활이랑 똑같았다. 좋은 연착륙이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학교 생활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10킬로 그램이 찔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아마도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그런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이 됐었나 보다. 학교는 퇴근이 없더라. 자유로운 대신 항상 과제가 있어 내가 스스로 시간을 정해서 해 내야 점수도 잘 받고 과제도 낼 수 있다. 도서관도 내가 의지를 내서 가야 하고, 안 가고 집에 있으면 계속 놀게 된다. 그런 상황이 많이 안 맞았다. 당시에 17명이 함께 사는 하우스 프로젝트에 살았는데, 거긴 부엌에 먹을게 늘 놓여 있어서 시시 때때로 먹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나는 빵과 과자가 다 비건이 아니라서 어쩌다 보니 다 끊고 현미밥 싸고 다니면서 먹었던 “건강한 비건”이었다. 그런데 여긴 “정크 비건”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빵은 다 비건이지, 마가린에 땅콩버터도 늘 있지, 살이 엄청 쪘다. 무릎이 아플 정도로 찌더라(웃음).

하우스 프로젝트는 한 집에 10명, 15명, 20명씩 사는 공동체 프로젝트다. 우연히 관심을 갖고 물어물어 라이프치에 있는 공동체를 알게 됐다. 베를린에서 어떤 모임을 가게 됐는데, 자기 친구가 라이프치히에 있는 하우스 프로젝트에서 산다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주더라. 이메일도 아니고 전화번호를 주다니 90년대인 줄 알았다(웃음). 전화로 연락해서 약속을 잡고 인터뷰를 하러 갔다. 이 곳은 지원자가 처음 몇 달을 시범으로 살아보고 나중에 구성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면 계속 살 수 있게 되는 구조였다. 나도 그쪽을 평가하고 그쪽도 나를 평가해서 모두가 동의하면 사는 거다. 당시 나는 첫 학기는 라이프치에 있을 예정이고, 다음 학기는 네덜란드로 가는 일정이어서 4개월 동안만 그곳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하우스 프로젝트에서 사는 동안 흥미롭긴 했지만 잘 안 맞는 부분도 많았다. 17명이 너무 많기도 하고, 나는 독일어를 못하는데 어떤 계획이나 의사결정을 다 독일어로 하니 참여하기도 어려웠다. 또 보통 다들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같이 놀고 잘 지냈는데 한 두 명은 내가 너무 정치적이지 않다고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나키스트, 좌파주의자, 안티파(anti-fascism, 반파시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나는 맨날 비건 모임이나 하고 있는 게 정치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친절했지만 한 두 사람이이라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을 매일 봐야 하는 게 재미없더라. ‘쟤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라는 시선이 있어서 좀 불편했다.

이 집은 베지테리언 하우스였는데, 비건은 나와 내가 처음 연락했던 친구 딱 2명밖에 없었다. 17명 전원이 다 베지테리언은 아니지만 부엌이 베지테리언이고 저녁식사는 항상 비건으로 했다. 집세도 내고 싶은 만큼 내고, 밥 값도 내고 싶은 만큼 내는 거다(대박). 이상적으로는 참 좋은데, 내가 낸 돈이 저 엄청난 양의 유제품을 사는데 쓰인다고 생각하니 너무 싫은 거다. 그렇다고 돈을 덜 내기는 또 싫었다. 인간적으로 유제품을 정말 많이 있었다. 냉장고의 절반이 치즈, 크림, 버터, 우유 같은 유제품이었다. 사실 유럽의 전체적인 베지테리언 중에 고기를 안 먹는 대신 유제품을 진짜 많이 먹는 경우들도 있다.  

의사결정 과정도 어려움이 있었다. 만장일치가 돼야 무언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아무것도 결정이 안됐다. 예를 들어 그때도 모두가 쓰레기를 적게 쓰는 것에 관심은 많았지만 싸고 편해서 카우프란트(Kaufland, 스위스 기업으로 독일에서도 유명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봤다. 이것을 포장지가 없는 물건들을 많이 파는 다른 마트로 바꾸려면 17명이 다 동의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한 거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 집에서 4개월만 살고 네덜란드에 갔다가 한 학기만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지금 사는 집을 구하기 전에 그 집에서 잠깐 더 있긴 했다. 당시 내 상황을 이해해 줘서 고마웠지만, 나는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사는 하우스 프로젝트보다 3-4명이 사는 WG(Wohngemeinschaft, 주거 공동체)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생각했다.

지금 사는 곳이 바로 3명 WG로 작은 쉐어하우스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과 플라스틱 없는 삶, 냉장고 없는 삶까지 도전해본 바가 있다. 하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비건 WG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서 집을 구하려고 보니 일단 집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자브뤼켄에서 같이 살았던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자기 친구 중에 한 명이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고, 그 친구(현재 룸메이트 사라)가 비건이 된 지 1년 정도 됐는데 아침마다 집에서 계란 굽는 냄새가 너무 힘들어 비건 WG가 있으면 자기도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 혼자서는 수입이 부족해 계약을 완료할 수 없었을텐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몰랐다. 나와 사라가 함께 집을 보기 시작해서 운이 좋게 지금 사는 집을 얻게 됐다. 4명 WG를 하고 싶었는데, 거실 1개, 침실 4개의 방 5개 짜리 큰 집 자체가 거의 없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이었던가 사라가 나에게 한 가정에서 냉장고가 차지하는 전력 소모량이 제일 크다고 말하면서 “우리 냉장고 없이 살아볼까?” 제안했다. 그때가 겨울이었고, 집에 발코니도 있고 하니까 “좋아! 해보자!”해서 하게 됐다. 물론 사라가 본 자료는 한국처럼 대부분 대형 양문형 냉장고를 쓰는 미국 자료니까 그런 것 같고, 독일은 아직도 작은 냉장고를 쓰는 집이 많아서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한 가정에서 24시간 돌아가는 냉장고가 전력을 많이 소모하는 것 같더라. 1년 반 동안 냉장고 없이 살았는데 괜찮았다. 물론 여름에는 힘들다. 아이스크림을 못 먹고 요리를 한 번에 많이 해서 저장해 놓을 수가 없고 그날 먹거나 그다음 날 먹어야 하니까 바쁘면 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나오는 냉장고는 에너지 효율이 굉장히 좋기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웃음). 나중에 에너지 효율이 좋은 냉장고가 중고로 나와서 샀다.

냉장고 없는 삶. 발코니에 음식을 둘 수 있도록 만든 선반 ⓒ 승혜

무엇보다도 실험을 해보고 싶으면 그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게 좋았다. 쓰레기 없이 살아보자 생각한 것을 혼자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할 수 있는 것. 이런저런 실험에 오픈 마인드를 가진 친구들을 다행히 잘 구했다. 비건이 아니더라도 이 집에서는 비건으로 살 수 있는 친구들 말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안 해보는 것, 실험을 하는게 참 멋있다. 누군가 무엇을 함께 해볼 수 있다는 기쁨이 큰 것 같다.

나도 그게 너무 좋았다. 그런 인풋(input)이 다른 친구들에게 온다는 게 참 좋았다. 그동안 나는 냉장고 없이 살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다. 물론 우리가 구한 집이 부엌에 파이프 두 개만 나와 있고 아무것도 없는 집이라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만약 냉장고가 있었다면 그냥 냉장고를 사용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친구가 제안을 한 것이다. 냉장고가 없이 살아보고 싶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게 감사하다. 만약 사라가 부모님이랑 살았다면 그런 이야기를 안 했을 거다(웃음). 내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나도 받아들일 수 있고, 다른 친구도 너무 재밌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게 좋다. 독일은 비건이나 어떤 대안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불편하다고 느끼기보다는 ‘멋지고, 쿨하다’고 본다. 한국에 있으면 ‘구질구질하다, 궁상맞다’고 하지 않겠나.

예를 들어 내 생일 때 친구들이 푸드쉐어링 (food sharing, 상점에서 더 이상 팔지 못하지만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유통기한 지나거나 못생긴 식재료를 모아서 나누는 활동들)을 통해 구한 채소들과 유기농 마트에서 산 채소들로 만든 채소 다발을 주었다. 그런 방식이 너무 좋다. 다들 이게 너무 쿨하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모임에서 누가 “내 음식 재료는 다 푸드쉐어링해서 구한 거야. 사지 않고 다 공짜로 얻은 거야” 그러면 다들 “너무 멋있다! 최고다! 어디서 했어?”라는 분위기가 나는 정말 신기하고 좋다. “덤스터 다이빙(dumpster diving, 쓰레기 뒤지기), 푸드쉐어링, 유럽 내에서 비행기 안 타기” 같은 것들은 다 여기서 학과 친구들이나 비건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배운 거다. 우리는 방학 때 누가 여행 갔다 왔다고 하면 “혹시.. 비행기 탔어?”하면 비행기 탄 애가 “아.. 미안해.. 비행기 탔어”하면서 수치스러워하는 분위기다(웃음). 물론 농담이지만 그런 게 잘못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오래 걸리고 힘들지라도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려고 노력한다.

친구들이 푸드쉐어링에서 구한 채소들로 만들어준 채소 다발 ⓒ 승혜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삶의 여유에서 오는 것 같다. 냉장고 없이 살기 위해 요리를 매일 하거나, 포장재 없는 가게를 일부러 찾아가서 장을 보거나, 비행기 없이 기차를 타는 여행은 다 시간이 훨씬 많이 든다. 예를 들어 인건비가 비싸니까 수선집 대신에 고장 난 물건을 가져가면 고치는 것을 ‘도와주는’ 리페어 카페(repair cafe)라는 대안적인 활동들이 있다. 거기서 도와주는 분들이 다 봉사로 하는 건데 많은 경우 은퇴하신 분들이거나 학생들이다. 봉사를 하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시간 동안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고도 이것을 해도 괜찮을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다. 은퇴하신 분들은 일단 연금이 많이 나오고, 학생들도 집에서 보조를 해주거나 집에서 보조할 형편이 안되면 정부에서 보조금이 나온다. 물론 여기도 학교 졸업해서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버는 게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복지제도의 허점은 있지만 내가 당장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굶어 죽거나 망한다는 생각을 덜 하는게,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발전이 가장 중요하고 빨리빨리 성장하고 매출이 나와야 한다.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내가 느긋하게 리페어 카페에 가서 쓰레기를 안 만들고 물건을 재활용할 수 있는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다. 한국 대학은 취업사관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당장 사회에 나가 취업을 할 수 있는 스펙을 쌓는 곳이다. 학점도 잘 받아야지, 인턴도 해야지, 공모전도 해야지 너무 치열하다. 이 와중에 언제 자원활동을 하나? 자원활동도 이력서에 쓸 활동만 주로 하게 되는 거다. 대학은 (좋고 나쁜 의미를 떠나) 굉장히 비정치화 됐다. 그런데 독일 대학은 아직 예전의 그런 70년대 사회운동 분위기가 남아 있어서 조금 놀랐다. 온갖 벽과 화장실 문에 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반 파시즘, 페미니즘, 동물권 관련 벽보와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문제는 여전히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은 자본주의를 못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시경제, 거시경제를 배웠지만 대안적인 경제학을 배우진 않았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학문이지만 결국 네오리버럴케피탈리즘(neoliberalcapitalism) 시스템 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 살았던 쉐어하우스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지만, ‘정치적이지 않다, 그게 어떻게 세상을 바꾸냐?’ 하는 비판들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건들이 “그럴 시간과 에너지가 있으면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해야지 너희는 동물보호만 하고 있냐?”하는 비판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동물 신경 쓸 거면 사람이나 신경 쓰라’고 하는데 보통 비건인 사람들이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기부도 하고 자원활동을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작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짜 인권 운동하는 사람들이 비건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경우는 없다. 인권이든, 동물권이든, 소수자 권리라는 측면에는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 동물, 식물,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장애인, 소수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정의, 사랑 등의 가치는 사실 무시되기 쉽다. 승혜님은 누구보다 이런 것들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생명권. 이 모든 것이 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모두의 행복할 권리인 것이다.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다. 나는 종교가 없어서 에티이스트(atheist)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판티이스트(pantheists)에 가깝다. 아예 신이 없다고 믿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신이다,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져 있다’고 하는 거다. 내가 인상깊게 읽은 책 중에 “신과 나눈 이야기(닐 도널드 웰쉬, 1997)”라는 책이 있는데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일부분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물론 나의 이과적인 마인드로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괜찮은 이론 같다(웃음). 모든 생명체가 나의 또 다른 일부라는 그런 관념 말이다. 물론 나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트럼프도 싫고 김학의 같은 각종 성범죄자들도 싫다. 권력유착관계에 있는 박근혜, 최순실도 다 싫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내가 남을 해치면서까지 이익을 얻어야 되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 피해가 소수자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아주 바람직한 마음가짐은 아니지만 약간의 카르마(업보) 같은 것도 생각을 한다(웃음). 내가 누구를 해하면 그게 나중에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물론 남을 밟고 일어서서 성공한 사람들도 많고 업보가 바로바로 돌아오는 게 아니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정말 행복한 사람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승혜님 삶에 더욱 적합한 방식을 찾고, 그렇게 살고 계신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외롭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리한 대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나?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데 그런 생각 안 든다. 학교 졸업하고 취직할 때는 남들하고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었고, 취직을 못하면 낙오자라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9살이나 나이도 많아졌고, 모아둔 돈은 조금 있지만 까먹고 있고, 경력도 없어서 더 안 좋은 상황이다. 물론 공부는 했지만 전문성을 쌓은 공부가 아니라서, 생존력만 봤을 때는 안좋은 상황이다. 우리 부모님은 아마 그게 큰 걱정일거다. 딸이 그럴듯한 대학을 나와서 취직해서 돈 잘 벌면서 회사 다니다가 유학을 갔는데, 졸업해서 박사도 못 구하고 취직도 못하고, 붕 뜬 상황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그런 낙오 스토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내가 독일에 있을 때 어떤 활동을 누구와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지 않나. 10년 후 20년 후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어렵고 그 불확실성에 불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정말 근거 없는 자신감인데 그렇다고 남들처럼 살아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다.

만약 비자 문제가 해결이 되어 외국에 더 있게 되면 에코빌리지(eco village) 투어 가이드도 하고, 하고 싶은 게 정말 많다. 만약 한국에서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일단 쫓겨날 일은 없을 거고(웃음), 채식투어 가이드도 하고 문화공간 같은 것을 운영하고 싶다. 돈이 되는 일과 돈이 안돼도 되는 일 두 가지를 하고 싶다. 채식 포트락 모임, 제로웨이스트 모임 등 재료비만 받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돈은 큰 워크숍이나 강연 등을 하면서 벌고 싶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누구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는 일을 하고 싶다. 문화공간일 경우 대관도 하고 말이다. 한국에 문화공간이 많지만 지속가능성과 창작을 접목을 한 곳은 많지 않다. 일단 이번에 한국에 3개월 가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이런 것 저런 것 많이 시도해보려고 한다. 실패하고 좌절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생각에는 ‘잘 되겠지’라는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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