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텐베르크(Lichtenberg)는 조금 애매한 지역이다. 베를린에 온 여행자들은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미테(Mitte)나 힙하다고 알려진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또는 안전하다고 알려진 샬롯텐부르크(Charlottenburg)를 찾기 때문이다. 리히텐베르크는 크로이츠베르크와 가까운 동쪽에 있지만 걸어서 갈 정도로 가깝지는 않아서, 여행객들이 잘 찾지 않는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올해로 12회를 맞은 리히텐베르크의 예술 이벤트 Lange Nacht der Bilder를 다녀오니, ‘아, 여기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과장한다 생각지 말아달라.
이 직관적이며 단순한 포스터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베를린에서 열리는 축제, 특히 예술 행사는 포스터 디자인부터 남다르게 뽐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자면 이 포스터는 아주 심플하다. 심지어 영어도 한 글자도 없다니. 화려한 꽃다발에 눈길을 빼앗겼다가 언젠가부터 수수한 들꽃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하게, 들꽃을 즐기는 마음으로 이 이벤트에 놀러 갔다.
우선은 Lange Nacht Der Bilder 의 뜻을 간단히 직역하면 ‘그림들의 긴 밤’이라 할 수 있겠다. 베를린 여름에는 이처럼 긴 밤(Lange Nacht)이 붙는 행사가 다양하다. 박물관, 경찰서, 학문, 정원… 긴 여름밤을 보내는 베를리너들이 가는 여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이벤트는 리히텐베르크 곳곳에 있는 총 40개의 갤러리, 아뜰리에 등에서 240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작년까지는 버스, 자전거로 하는 투어만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워킹 투어도 추가됐다. 무료로 진행된 투어에는 각각의 팀이 한 팀이 되어 같이 움직이며, 각 장소별로 가이드의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 모든 투어의 비용이 무료였다는 점이 놀랍다. 투어가 아닌 개인적인 방문객의 입장료나 전시 참여 아티스트가 내야 하는 비용도 일절 없었는데, 리히텐베르크 구청장 Michael Grunst의 말을 빌리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가 된다. ‘리히텐베르크는 문화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으며, 이 이벤트는 그러한 점을 보여주는 장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제의 장을 위해 베를린 정부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와 사회 주택 회사에서도 지원했다고 한다.
1.Christian Awe의 아뜰리에
처음으로 간 곳은 Christian Awe의 아뜰리에였다. Christian Awe는 독일이 통일된 후 그래피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후 베를린의 예술대학인 UDK에서 한국으로 말하자면 석사학위(Meisterschüler)까지 마쳤다. 그 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해외와 독일 곳곳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Lange Nacht der Bilder에서는 그의 작품은 Wasser Farbe(뜻: 물의 색) 시리즈를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추상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예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특히 아뜰리에 벽에 뿌려진 물감과 작품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래피티의 경험이 작품에도, 아뜰리에에도 묻어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2.Studio Bildende Kunst Lichtenberg
이렇게 보면 Lange Nacht der Bilder는 전문 아티스트들만의 축제 같지만, 두 번째로 간 곳은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예술 공간인 Studio Bildende Kunst Lichtenberg에서 진행된 전시였다. 이곳은 베를린의 비영리 단체 Kulturring Berlin에서 운영되는 16곳 곳 중 한 센터이다. Kulturring Berlin은 주민들에게 여가 활동을 위한 다양한 기회를 보장하고, 문화적 교류를 위해 설립되었다. 회화뿐만 아니라 사진, 오케스트라,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 특화된 센터가 있으며 현재는 200명 이상의 회원이 있다.
전시 공간과 조명이 전문 갤러리 같지는 않았지만, 이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전문 아티스트의 작품은 갤러리 등에서 보여줄 기회가 있지만, 이렇게 취미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보여줄 기회를 가지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면 일기장 같은 작품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되는데, Lange Nacht der Bilder라는 이벤트를 통해 매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가지는 건 큰 의미로 다가온다.
3.rk – Galerie für zeitgenössische Kunst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곳은 rk – Galerie für zeitgenössische Kunst에서 진행된 전시 Wildnis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을 의미하는 Wildnis라는 주제로 다섯 명의 아티스트들이 다양한 회화, 조각, 비디오 작품을 전시했다.
Wolfgang Flad는 섬유디자인과 회화를 배운 뒤 개인 또는 그룹 전시로 미국과 유럽의 다양한 나라 등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그는 2006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목재와 알루미늄을 소재로 한 실험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위 작품은 2015년에 제작되었으며, 유연함과 곧음이 전시 주제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베를린 예술 대학인 UDK에서 공부한 Tine Benz는 독일과 해외에서 회화와 콜라주, 설치 작업 전시를 주로 하고 있다. 위 작품은 Tine Benz이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120*100 크기의 또 다른 세계에 빠져들어 가게 한다.
서두에 말했듯 리히텐베르크 지역은 여행객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지역이지만, 아티스트와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리히텐베르크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매년 가을에 열리는 Lange Nacht der Bilder에서 지역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를 만나보자. 이방인도 반갑게 맞아준 이곳, 리히텐베르크를 추천한다.
12회 Lange Nacht der Bilder
전시 기간: 2019년 9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