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저자(글) 웨일북(whalebooks) 2023년 10월 15일

고통 구경하는 사회, 그리고 세월호

지난 4월 16일 광주 독립영화관에서 “세 가지 안부”라는 다큐를 봤다. 옴니버스로 구성된 세 개의 이야기 중 하나는 <그레이존>이라는 세월호 참사 직후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해 유가족과 실종자 수색작업을 취재하러 간 언론인들의 이야기였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을 카메라로 담아야 하고,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느낀 기자들의 고통, 그러면서도 직업적 관습에 따라 눈물 흘리는 유가족, 고통에 몸부림치는 유가족을 클로즈업하는 스스로에게 혐오를 느꼈다는 기자도 있었다. 진도 앞바다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바지선을 타고 나간 사람들로부터 현장에서 듣는 진실과 정부발 거짓 정보 사이에서 결국 정부의 공식 발표를 그대로 전파할 수밖에 없었던 언론의 생리, 그로 인해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유가족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기레기 새끼들’이라는 욕을 먹고 날아오는 쓰레기를 맞고, 현장에서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날 직업적 회의를 느끼고, 결국 자신이 일하던 언론사를 나온 기자들도 있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고 나누면서, 오랜만에 우리가 그동안 두 눈으로 목격했던 사회적 참사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세월호 얘기는 빠질 수가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직후부터 침몰까지, 그날 하루 종일 온 국민이 사람들이 갇혀있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전원 구조했다고 보도된 언론을 믿고 안심했고, 그다음에는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결국 아무도 구조해 내지 못했다고 했을 때의 충격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보고만 있었구나 하는 무력감이 컸다. 참사와 유가족의 처절한 고통을 그대로 목격한 것은 트라우마가 되어, 10년이 지난 후에도 4월 16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숨이 가쁘고 눈물이 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본 장면들과 정보들이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면서도,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세월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고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참사 역시 쉽게 묻히고 잊힐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에는 2년이 채 되지 않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에 있다. 이태원을 보도하는 뉴스는 세월호와는 많이 달랐다. 많은 영상에서 현장의 모습들이 흐리게 처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태원 참사 때는 세월호 때보다는 훨씬 더 많은 1인 미디어들이 있었고, 이 영상들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전파됐다. 이태원 참사에 관한 영상은 또 한 번 트라우마가 될까 봐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었는데, 혹여나 이 참사를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내 삶에 이태원은 계속 지워지고 있는 게 아닐까. 세월호처럼 참사가 그대로 보도되고, 피해 정도가 샅샅이 밝혀지고, 가해자들이 지목되고, 유가족들의 고통이 더 많이 전파되어야 했을까?

한국 사회에 여러 사회적 참사가 기억되는 방식 중 개인이 호명되는 방식/개인을 증언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눴다. 조심스레 세월호 가족 중에는 기억되고 싶지 않은, 잊혀지고 싶은, 이 고통을 개인의 고통으로 묻어두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나눴다. 개인의 이야기와 고통이 드러날 때, 사실 그 안에는 이를 전시하기를 원하는 욕망, 이것을 이슈화하고 싶은 욕망, 그러면서 이 참사를 계속 사회적으로 붙잡으면서 정치적으로 계속 이용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나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제주 4.3, 광주 5.18과 같이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단순히 희생자 규모만이 아니라 당시 국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보도에 개입하고, 이후 참사를 덮으려는 수많은 시도를 통해 희생자를 확대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정치적 압력도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라는 생각도 나눴다. 세월호가 정치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범진보에서 오랫동안 함께 추모해야 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참사, 국가폭력 등을 다루는 언론의 역할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도 윤리에 따라 공적인 차원의 목격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하는 언론이 개인 미디어와는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이 보도 윤리가 개입되지 않고 훈련받지 않는 개인 미디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극우 유튜브 방송인들과 일부 언론은 많이 닮아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할 당시, JTBC가 태블릿 관련 사건을 스토리텔링처럼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탄핵이라는 스펙터클까지 이어졌던, 그런 역할을 언론이 하기도 하지만, 배우 이선균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이선균과 관련된 사건을 기자들이 보도하는 방식, 개인과 가족의 고통이 전시하면서 여론을 만들고, 결국 이것이 개인의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역할도 하지 않았나.

언론에는 양면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언론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눴다. 포털에서 보여주는 기사만 읽는다면 우리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어떤 장면은 평생 기억되는 것이 있다. 어제 일도 잊어버리는 우리 개인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순간과 장면은, 어떤 사건은 언론을 통해, 교육을 통해, 공적인 차원에서 기억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수한 고통을 전시하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고통을 오래 기억하는 사회에 사는 편이 낫다. 어떤 고통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다.